강동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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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동성 전투는 1219년 고려와 몽골, 그리고 동하국 연합군이 거란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쇠퇴한 금나라에서 독립한 거란족은 고려를 침략했으나, 고려와 몽골의 연합 공격으로 강동성에 고립되었다. 몽골, 동하국, 고려 연합군은 강동성을 포위 공격했고, 거란 왕자 함사가 자결하고 5만여 명이 항복하면서 거란은 멸망했다. 이 전투는 고려와 몽골 간의 최초의 교섭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후 몽골 제국의 팽창과 함께 동하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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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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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성 전투 | |
전투 정보 | |
분쟁 | 강동성 전투 |
날짜 | 1218년 ~ 1219년 |
장소 | 북계 강동성(江東城) |
결과 | 여몽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몽골 제국 동진국 금나라 |
교전국 2 | 후요 |
지휘관 | |
지휘관 1 | 몽골 제국 카치운 살리타이 푸타우 저고여 탕구타이 고려 조충 김취려 동진 완안자연 |
지휘관 2 | 후요 야율함사 † |
병력 | |
병력 1 | 3만 |
병력 2 | 미상 |
사상자 | |
사상자 1 | 미상 |
사상자 2 | 미상 |
2. 배경
1211년부터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금나라는 장성 이북의 통제를 잃고, 1213년에는 야율유가가 "요왕"을 칭하며 요동 지방에서 자립했다.[1][2] 야율유가는 몽골 제국의 산하에 들어가 보호를 받았지만, 몽골에 종속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야율사불이 야율걸노, 야율금산, 야율청구, 야율통고여 등에 의해 추대되어 1216년에 자립했다.[3] 야율사불은 야율유가와 마찬가지로 "요"를 국호로 삼았지만, 이 정권은 야율유가의 요(동요) 등과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후요"라고 불린다.
황제를 칭한 야율사불은 국가 제도를 정비했지만, 즉위한 지 70여 일 만에 내분에 휘말려 살해되었기 때문에, 승상의 지위에 있던 야율걸노가 감국으로서 국정을 맡았고, 원수 어아와 함께 병민을 좌익·우익으로 나누어 고려와의 국경에 가까운 (현재의 펑청 시)· (현재의 의주군)에 주둔했다.[4][5]
이에 대해, 금나라는 개주의 수장 중가노를 파견하여 후요 정권을 공격했고, 또한 야율유가도 몽골 병사 수천 명을 빌려 후요군을 격파했다.[6] 겹겹이 포위된 후요 정권은 동남쪽으로 도망쳐 고려에 침입했지만, 거기서 다시 내분을 반복했고, 야율금산·야율통고여 등이 살해된 후 국왕이 된 야율함사가 최종적으로 후요의 지배권을 쥐게 되었다.[7] 그러나, 후요 정권이 금나라·몽골·동진국·고려라는 주변 여러 나라를 모두 적으로 돌려 고립 상태에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고, 궁지에 몰린 후요 정권을 최종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이 강동성 전투였다.
1216년(고종 3) 몽골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은 한때 황해도 지방까지 출몰하였으나, 고려 침입 이후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분(內紛)과 고려 관군의 토벌 작전으로 그 형세가 꺾여 드디어 강동성에 입거(入據)하였다.
2. 1. 거란의 고려 침입
1216년(고종 3) 몽골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은 한때 황해도 지방까지 출몰하였으나, 고려 침입 이후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분(內紛)과 고려 관군의 토벌 작전으로 그 형세가 꺾여 드디어 강동성에 입거(入據)하였다.2. 2. 고려의 대응과 몽골-동진 연합군의 등장
그 뒤 몽골 원수 합진은 강동성을 쳐부수고자 서북면 원수 조충에게 군사의 증파(增派)를 요구하였고, 서북면 병마사 김취려는 지병마사 한광연(韓光衍, 1155년~1237년 4월 26일(음력 3월 30일))과 같이 십장군병(十將軍兵) 및 신기(神騎)·대각(大角)·내상(內廂)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몽골군 진영으로 나아갔다.[35]수일 후 조충(趙沖)도 합세, 몽골 장수 합진 등과 같이 공동작전을 모의하였다. 적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미리 성 밑에 넓이 깊이 각 10자의 못을 파기 시작하여, 성의 남문(南門)으로부터 동남문(東南門)에 이르는 사이를 완안자연(完顔子淵)이 맡고, 동문(東門) 이북은 김취려가 맡아 공격하였다.[35]
이에 거란은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40여 인이 성을 넘어 몽골군에 항복하니 거란 왕자 함사(喊舍)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그의 관인(官人)·장졸·부녀는 모두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5만여 인이었다.[35]
합진은 조충 등과 더불어 투항의 상황을 순시하였다. 그때 왕자의 처자 및 위승상(僞丞相)·평장(平章) 이하 백여 인을 즉시 참형(斬形)에 처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죽이지 않고 여러 군(軍)으로 지키게 하였다. 이로써 3년에 걸쳐 고려를 괴롭혔던 거란을 연합군은 별다른 큰 전투(戰鬪)와 희생 없이 토벌하였다.[35]
3. 경과
1218년 4월, 거란병이 더욱 남하하여 청천강, 대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자, 고려 측은 새롭게 김군수를 조충 대신 서북면병마사로 임명했다.[8][9]。같은 해, 거란병은 양주(운산군, 박천군 사이)를 침략하고, 곡주(황해도의 동쪽 끝)에서 고려군과 싸웠다.[10][11]。한편, 조충은 여러 도의 병사를 모아 장군 이돈수, 김계봉 등과 함께 거란병을 토벌했고, "적의 수괴(=함사)"는 퇴각하여 강동성으로 들어갔다.[12]。
같은 해 말 12월, 고려의 동북 국경에서 "몽골(蒙古) 원수" 하진과 찰랄이 이끄는 몽골 제국군 1만 명과 포선만노가 파견한 완안자연이 이끄는 동하국군 2만 명의 연합군이 나타나 고려국에 협력하여 "단적(=후요 정권)"을 토벌할 것을 제의했다.[13][14]。이 무렵, 폭설로 인해 몽골·동하국 연합군은 병참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후요 정권의 근거지인 강동성을 공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5]。이에 하진은 통역 조중상과 덕주에서 동행한 진사 임경화를 고려군 지휘관 조충에게 파견하여, "황제(=칭기즈 칸)는 거란병이 너희 나라로 도망쳐 이제 3년이 되었음에도 아직 소멸시키지 못했으니,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고자 한다. 너희 나라가 단지 군량을 지원해주기만 하면 부족한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전했고, 또한 "황제는 '적(후요)을 멸망시킨 후 약속하여 형제의 관계를 맺자'고 명령했다"라고 덧붙였다.[16]。조충은 상서성의 허가를 얻은 후 중군 판관 김량경에게 쌀 1천 석을 수송하게 했고, 이를 맞이한 몽골·동하국 양 원수는 연회를 열어 "양국이 형제의 관계를 맺은 것을 국왕에게 보고하여 문서를 받으면, 우리는 그것을 황제에게 보고하겠다"라고 말했다.[17][18]。
여러 차례의 교섭을 거쳐 고려군과 몽골·동하국 연합군은 협력하여 강동성을 공격하기로 약속했고,[19] 남문에서 동남문은 몽골군을 이끄는 하진이, 서문에서 북쪽은 동하국군을 이끄는 완안자연이, 동문에서 북쪽은 고려군을 이끄는 김취려가 담당하기로 결정되었다.[20]。몽골·동하국·고려국 연합군의 위용을 본 후요군은 싸우지 않고 전의를 상실했고, 40여 명이 성을 나와 몽골군에 항복했기 때문에, 패배를 깨달은 "적의 수괴인 함사 왕자(賊魁喊舎王子)"는 스스로 목을 매어 1219년 정월 14일에 강동성이 함락되었다.[21]。후요에 속한 관인, 군졸, 부녀 5만여 명은 성문을 열고 투항했고, 이를 받아들인 하진 등은 함사의 처자 및 승상, 평장 등 고관 100여 명을 처형한 외에는 생명을 빼앗지 않고 포로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후요는 멸망했다.[22][23]。
3. 1. 동맹 제의와 협상
1218년(고종 5) 칭기즈칸은 그의 원수(元帥) 합진(哈眞)이 이끈 1만의 군대와 동진(東眞 : 동하)의 장수 완안자연(完顔子淵)이 인솔한 2만의 병력을 연합하여, 고려에 보내어 거란을 토멸하고 고려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동북면의 성천·강동 지방에 상륙하였다. 적의 거성(據城)이던 화주(和州)·맹주(孟州)·덕주(德州)·순주(順州)의 4성(城)을 차례로 쳐부수고 적의 주력이 있는 강동성을 향하여 쳐내려 왔다.[34][35]그러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의 보급로가 끊어지고, 강동의 적은 성벽을 굳게 하여 공위자(攻圍者)를 피로케 하려고 하므로 몽골 장수 합진은 고려의 서북면 원수부에 통사(通事 : 통역관)를 보내어 군량의 원조(援助)를 요청하고, 또 거란을 쳐부순 뒤에 몽골·고려 양국이 형제의 약속을 맺을 것을 내용으로 하는 통첩을 몽골 황제 칭기즈칸의 이름으로 전해 왔다.[35]
원수부(조충)에서는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중군판관(中軍判官) 김양경(金良鏡)을 보내어 정예병 1천으로 쌀 1천 섬을 호송케 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에서는 몽골이 거란을 물리치고 고려를 구한다고 하지만 몽골은 일찍이 이적(夷狄) 가운데서도 가장 흉한 종족으로서, 서로 접촉한 일이 없는 생소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의 참뜻을 의심하여 강화가 늦어졌다.[36]
다음 해인 1219년(고종 6) 정월, 드디어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祉侯) 윤공취(尹公就)와 중서주서(中書注書) 최일(崔逸)이 결화의 첩문(諜文)을 가지고 몽골 군영(軍營)에 가고, 몽골도 답례의 사자를 보내어 서로 화의(和義)를 굳게 하였다.[35]
3. 2. 강동성 전투
몽골 원수 합진이 강동성을 쳐부수고자 자주 서북면 원수 조충에게 군사의 증파(增派)를 요구하였고, 서북면 병마사 김취려는 지병마사 한광연(韓光衍, 1155년~1237년 4월 26일(음력 3월 30일))과 같이 십장군병(十將軍兵) 및 신기(神騎)·대각(大角)·내상(內廂)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몽골군 진영으로 나아갔다.[35]수일 후 조충(趙沖)도 합세, 몽골 장수 합진 등과 같이 공동작전을 모의하였다. 적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미리 성 밑에 넓이 깊이 각 10자의 못을 파기 시작하여, 성의 남문(南門)으로부터 동남문(東南門)에 이르는 사이를 완안자연(完顔子淵)이 맡고, 동문(東門) 이북은 김취려가 맡아 공격하였다.[35]
이에 거란은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40여 인이 성을 넘어 몽골군에 항복하니 거란 왕자 함사(喊舍)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그의 관인(官人)·장졸·부녀는 모두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5만여 인이었다.[35]
합진은 조충 등과 더불어 투항의 상황을 순시하였다. 그때 왕자의 처자 및 위승상(僞丞相)·평장(平章) 이하 백여 인을 즉시 참형(斬形)에 처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죽이지 않고 여러 군(軍)으로 지키게 하였다. 이로써 3년에 걸쳐 고려를 괴롭혔던 거란을 연합군은 별다른 큰 전투(戰鬪)와 희생 없이 토벌하였다.[35]
4. 결과
이때 몽골 원수 합진은 고려 원수 조충 등과 양국의 결호(結好)와 형제의 맹약(盟約)을 맺고, 합진은 거란의 부녀(婦女)·동남(童男) 7백 명과 적에게 붙잡혀 갔던 고려 백성 2백 명을 고려에 돌려주었다. 특히 15세가량의 거란 여자 각 9인과 준마(駿馬) 각 9필(匹)을 조충·김취려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전부 몽골로 끌고 가게 했다. 조충은 이러한 거란의 부로(俘虜 : 포로)들을 각도(各道)의 주·현에 분송(分送)하고 땅을 주어 살게 하였는데 이들이 살던 곳을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37]
이 강동성 전투는 고려를 괴롭히던 거란을 완전 소탕했다는 의의 외에도 이 싸움으로 해서 형성되었던 고려와 몽골 간의 최초의 교섭을 기점으로 그 후에 복잡하고도 중대한 여몽 관계가 전개되었음을 들 수 있다.
1219년부터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을 시작하고, 몽골군의 대부분이 동아시아를 떠나면서 1220년대의 동북아시아에서는 동하국, 고려국, 요동의 금나라 잔존 세력이 병립하는 상황이 정착되었다. 강동성 전투를 거쳐 몽골 제국과 우호 관계를 수립한 고려국은 매년 서로 사신을 파견하기로 약속했으며, 사신은 반드시 "만노의 땅(동하국)"을 통과하도록 정해져 있었다[24]。
그러나 1224년 정월, 동하국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두 통의 국서를 가져왔다. 한 통에는 "몽골의 칭기즈 칸은 멀리 가서 행방을 알 수 없고, [몽골 본토에 남은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인] 옷치긴은 탐욕스럽고 어질지 않으며, [동하국은 몽골 제국과의] 묵은 우호를 이미 끊었다"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한 통에는 교역장(거래 관리소)을 서로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25]。이를 받아들여 몽골 제국의 사신 고여 등은 기존의 동하국 영토를 통과하는 루트가 아닌 압록강 하류 유역을 넘어 고려 국내로 들어갔으나[26], 1225년 정월 귀로에 도적에게 살해당했다[27]。 이 사건을 겪은 후 몽골 제국, 동하국, 고려국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정기적인 사신 왕래는 끊어졌으며, 포선만노는 종종 고려에 출병하게 되었다. 1225년 8월에는 삭주를[28], 1227년 9월에는 정주, 장주를[29], 1228년 7월에는 장평진을[30], 각각 동하국의 군대가 침략했다. 1229년 2월에는 동하국에서 고려에 강화 사신이 파견되었으나[31], 협상은 실패로 끝나[32] 다시 고려 영토인 화주가 약탈을 당했다[33]。 이 기간 동안 포선만노가 고려국에 말한 바와 같이 몽골 제국에서는 칭기즈 칸이 항상 서방에서 원정 중에 있었고, 몽골군은 요동 방면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칭기즈 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오고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몽골에서 발족하자, 동하국과 고려국은 다시 몽골군의 침공에 노출되게 되었다.
4. 1. 몽골과의 관계 변화
1219년 강동성 전투에서 고려 원수 조충은 몽골 원수 합진과 양국의 우호 및 형제 맹약을 맺었다.[37] 이 전투로 고려를 괴롭히던 거란이 소탕되었고, 고려와 몽골 제국 간의 최초 교섭이 이루어져 복잡하고 중대한 여몽 관계가 시작되었다.[37] 합진은 거란의 부녀자와 동남 7백 명, 고려 백성 2백 명을 고려에 돌려주었으며, 조충은 이들을 각 도의 주현에 분산시켜 정착하게 하였고, 이들이 살던 곳을 거란장이라 불렀다.[37]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으로 1220년대 동북아시아에는 동하국, 고려국, 요동의 금나라 잔존 세력이 병립하는 상황이 되었고, 고려는 몽골과 우호 관계를 맺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24] 그러나 1224년 동하국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몽골과의 우호 관계를 끊었다고 알리고 교역장 설치를 요구했다.[25] 1225년 몽골 제국 사신 고여 등이 귀로에 도적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몽골, 동하, 고려 간 관계는 악화되었고, 정기적인 사신 왕래는 중단되었다.[27] 이후 동하국은 1225년 삭주[28], 1227년 정주와 장주[29], 1228년 장평진[30]을 침략했고, 1229년 강화 협상이 실패한 후 화주를 약탈했다.[33] 칭기즈 칸 사후, 오고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몽골 체제가 들어서면서 동하국과 고려국은 다시 몽골군의 침공에 직면하게 되었다.
4. 2. 동하국의 고려 침공
1219년부터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을 시작하고, 몽골군의 대부분이 동아시아를 떠나면서 1220년대의 동북아시아에서는 동하국, 고려국, 요동의 금나라 잔존 세력이 병립하는 상황이 정착되었다. 강동성 전투를 거쳐 몽골 제국과 우호 관계를 수립한 고려국은 매년 서로 사신을 파견하기로 약속했으며, 사신은 반드시 "만노의 땅(동하국)"을 통과하도록 정해져 있었다.[24]그러나 1224년 정월, 동하국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두 통의 국서를 가져왔다. 한 통에는 "몽골의 칭기즈 칸은 멀리 가서 행방을 알 수 없고, [몽골 본토에 남은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인] 옷치긴은 탐욕스럽고 어질지 않으며, [동하국은 몽골 제국과의] 묵은 우호를 이미 끊었다"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한 통에는 교역장(거래 관리소)을 서로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25] 이를 받아들여 몽골 제국의 사신 고여 등은 기존의 동하국 영토를 통과하는 루트가 아닌 압록강 하류 유역을 넘어 고려 국내로 들어갔으나,[26] 1225년 정월 귀로에 도적에게 살해당했다.[27] 이 사건을 겪은 후 몽골 제국, 동하국, 고려국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정기적인 사신 왕래는 끊어졌으며, 포선만노는 종종 고려에 출병하게 되었다.
1225년 8월에는 삭주를,[28] 1227년 9월에는 정주, 장주를,[29] 1228년 7월에는 장평진을,[30] 각각 동하국의 군대가 침략했다. 1229년 2월에는 동하국에서 고려에 강화 사신이 파견되었으나[31] 협상은 실패로 끝나[32] 다시 고려 영토인 화주가 약탈을 당했다.[33] 이 기간 동안 포선만노가 고려국에 말한 바와 같이 몽골 제국에서는 칭기즈 칸이 항상 서방에서 원정 중에 있었고, 몽골군은 요동 방면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칭기즈 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오고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몽골에서 발족하자, 동하국과 고려국은 다시 몽골군의 침공에 노출되게 되었다.
5. 역사적 의의와 평가
5. 1. 긍정적 측면
5. 2. 부정적 측면
5.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참조
[1]
서적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
[2]
서적
池内194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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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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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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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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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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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巻22高宗世家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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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巻22高宗世家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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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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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高麗史』巻22高宗世家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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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고려사
1218-12-01
[35]
서적
익재난고
[36]
서적
동국이상국집ㆍ전집
[37]
서적
익재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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